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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믿을 수 없다..절제 잃은 ML에 불어닥친 ‘이물질 폭풍’[슬로우볼]
2021-06-10 06:00:02
 


[뉴스엔 안형준 기자]

2014년 그렉 매덕스가 명예의 전당 헌액 피투표권을 얻었을 때 그가 쿠퍼스타운으로 향할 것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관건은 그가 만장일치로 입성하느냐였다. 하지만 매덕스는 득표율 97.2%에 그쳐 만장일치에 실패했다. 그에게 표를 던지지 않은 MLB.com의 베테랑 기자 켄 거닉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스테로이드 시대에 뛴 매덕스가 약물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다'고.

매덕스가 스테로이드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없었고 거닉은 이 일로 큰 공분을 샀다. 투표권을 가진 이가 소신껏 권리를 행사했고 당당히 이유까지 밝혔으니, 거닉의 선택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질 이유는 없다. 다만 시시하는 바는 있다. 매덕스가 뛴 시대는 만연한 약물로 인해 '누구나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시대'였다는 것이다.

'모두가 의심받는 시대'가 메이저리그에 다시 한 번 도래하는 듯하다. 이번에는 스테로이드가 아닌 투수의 이물질이다. 최근 꾸준히 불거져 온 투수들의 이물질 사용 의혹이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물질'이란 투수가 공을 더 잘 던지기 위해 손에 바르는 '규정 외 물질'을 의미한다. 사실상 로진백을 제외한 모든 것이 이물질이다. 투수들은 상당히 미끄러운 표면을 가진 공인구를 더 잘 컨트롤하기 위해 '끈적한 물질'을 손에 바른다. 이 이물질들은 손과 공의 마찰력을 높여 던질 때 공이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해준다. 이물질의 대표적인 효과로는 제구 향상, 패스트볼 회전수 증가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6월 9일(한국시간)까지 사무국에서 공식적으로 이물질 사용으로 징계를 받은 이는 없다. 법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법적인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아직 '유죄 판결'을 받은 이는 없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함부로 누군가를 유죄로 추정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합리적 의심은 피어나고 있다.

의심스러운 정황은 너무도 많다. 2021시즌 메이저리그는 초반 유례없는 투고 현상을 겪었다. 타자들의 성적이 부진하기도 했거니와 투수들의 기록이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좋아졌다. 개막 7주만에 노히터가 6번이나 쏟아진 것이 대표적인 현상. 그것도 '에이스급'과는 거리가 먼 투수들이 대기록을 쏟아냈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나오는 노히터를 과연 대기록이라 불러야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디 애슬레틱에 따르면 올시즌 포심 패스트볼의 평균 회전수가 2,400rpm 이상인 투수는 전체 투수의 35% 이상. 이는 메이저리그가 스탯캐스트를 도입한 2015년보다 두 배 가까이 상승한 수치다. 2015년에는 18%였지만 단 6년만에 두 배 가까이 수치가 뛰었다. 최근 1-2년 사이에 회전수가 수백rpm씩 증가한 투수들이 수두룩하다. 일반적인 훈련 방법으로 단기간에 이정도의 회전수 증가를 이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회전수가 증가하면 공의 위력도 증가한다.

디 애슬레틱은 현역 선수들, 야구계 내부 인사들의 증언을 모아 이미 메이저리그에 이물질 사용이 만연하다고 밝혔다. 이물질의 정체도 드러났다. 콜라를 졸여 만든 것, 파인타르와 로진을 혼합한 '펠리칸 그립 딥', 스파이더 택 등 여러 선택지를 두고 투수들이 각자 손에 맞게 고른다고 한다. 스파이더 택은 '스트롱 맨'들이 무거운 물체를 더 잘 들기 위해 손에 바르던 물질. 몇 백 파운드짜리 바위를 들기 위해 손에 바르던 것인 만큼 상상 이상의 끈적임을 가진 물질이다. 손에 스파이더 택을 바르면 기름으로 지워야 지워진다는 말도 있다.

트레버 바우어(LAD)의 발언으로 최근에야 수면 위로 떠올랐고 올시즌을 앞두고서야 사무국이 집중 단속을 예고했지만 이물질의 사용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디 애슬레틱은 "수십년 동안 투수들은 이물질을 사용해왔다"고 짚었다. 이물질 사용의 가장 큰 이유로 알려진 것은 공인구가 너무 미끄럽다는 것. 시속 160km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들이 공을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없다면 투구에 맞아 다치는 타자도 많아지게 된다. 이런 이유로 이물질 사용이 묵인돼 온 측면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불거지는 이물질의 문제는 '타자를 맞히지 않기 위해'라는 이유를 대기에는 너무 심각해졌다고 봐야 한다. '미끄러운 공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스파이더 택 같은 이물질의 사용은 성적 향상을 위한 부정행위임이 분명하다. 스파이더 택 수준의 이물질 없이는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없는 투수라면 프로 수준이라고 볼 수 없다.

사무국은 7주 동안 6번이나 노히터가 나올 때까지 이렇다할 단속을 하지 않았다. 존 민스(BAL)처럼 의심스러운 동작을 취하며 회전수가 급증한 투수가 있었음에도 사무국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최고참 심판인 조 웨스트가 지오바니 가예고스(STL)의 모자에 묻은 이물질을 지적한 것을 시작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사무국은 말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이물질에 대한 규정을 손보겠다고 나서고 있다.

9일 진행된 게릿 콜의 화상 인터뷰도 이물질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콜은 드래프트 전체 1순위 지명자 출신의 에이스지만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시절에는 특급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휴스턴 애스트로스 이적 후 패스트볼 회전수가 크게 증가하며 사이영상급 투수로 급성장했고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액 FA 계약을 따낸 투수가 됐다. 휴스턴 유니폼을 입은 콜의 회전수 증가에 이물질이 개입했다는 의심은 몇 년 전부터 있었다. 그리고 콜은 사무국이 최근 이물질 규제를 더 강화하겠다고 밝힌 뒤 가진 등판에서 회전수가 뚝 떨어진 공을 던지며 부진했다.

화상인터뷰에서 뉴욕 포스트 베테랑 기자인 켄 다비도프는 콜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스파이더 택을 사용했느냐"고. 질문을 받은 콜은 크게 당황해 몇 초간 얼어붙은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선수들 간에는 세대를 이어오는 노하우가 있으며 그 중에는 환영받을 것도, 그렇지 못한 것도 있고 그에 대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전형적인 '회피형' 동문서답을 내놓았다. 콜의 인터뷰를 본 사람들은 콜이 '예스'라는 대답을 아주 길게 늘여 말했다고 반응하고 있다.

디 애슬레틱에 따르면 이미 이물질은 퍼질대로 퍼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선수들이 '모두가 쓰는데 나만 안쓸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디 애슬레틱은 투수들이 라커룸에서 대놓고 이물질을 바른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일부 투수들은 '내가 이물질을 바르고 던지는 공은 아무도 못칠 것이다. 남들이 뭐라고 불만을 갖고 어떤 준비를 하든 신경쓰지 않는다'는 당당함까지 보이고 있다. 투수들이 이물질 사용에 이미 '맛'을 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투수들의 도덕적 해이와 사무국의 안일한 대처 등 여러가지 요소들이 이 상황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사무국은 이물질 사용을 금지하는 규정이 있음에도 이를 철저하게 적용하지 않으며 상황이 심각해지도록 방치했고, 사무국의 방치 속에 투수들은 눈감아 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무절제한 모습을 보였다.

디 애슬레틱에 따르면 6월초 열린 구단주 회의에서 투수들의 이물질 사용이 리그 환경을 해치는 수준에 이르러 더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고 이에 따라 사무국이 제대로 된 규제를 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기존에는 상대팀의 어필에 의해서만 이물질 여부를 심판이 검사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심판 재량으로 투수를 검사할 수 있게 규정이 바뀔 것으로 보인다.

조시 도날드슨(MIN)이 목소리를 높였듯 이물질 문제는 제 2의 스테로이드 스캔들 수준으로 커질 수도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스포츠 전문 웹진인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는 이미 이물질 문제에 대해 '새로운 스테로이드'라며 '스포츠계의 가장 큰 스캔들이 될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리그 내에 걷잡을 수 없이 퍼져있다는 증언들이 속속 나오는 만큼 누구도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기 어렵다. 규제 강화 움직임 직후 부진한 콜이 추궁에 가까운 질문을 받았듯 이제부터 부진하는 투수들은 일단 의심부터 당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노히터를 달성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내다가 공교롭게도 규제 강화 논의 즈음에 부상자 명단으로 향한 투수들도 의심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당신이 응원하는 선수가 부정행위를 했을 수도 있다'.

선수를 옹호하는 일각에서는 이물질은 미끄러운 공 때문에 등장한 필요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요악 역시 악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고 '필요'의 수준을 넘어선다면 그것은 '순수한 악'일 뿐이다. 과연 메이저리그에 불어오는 이물질 폭풍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자료사진=메이저리그 공인구)

뉴스엔 안형준 marka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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