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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팔’ 유재명 “캐스팅 너무 빨리 돼 당황했다”(인터뷰)
2015-12-30 06:23:01
 

[뉴스엔 글 김다솜 기자/사진 이재하 기자]

'응답하라 1988'이 제대로 된 배우 한 명을 대중들에 소개했다 싶다. 이토록 연기 밖에 모르고, 절실한 배우가 또 있을까.

배우 유재명은 tvN '응답하라 1988'(극본 이우정/연출 신원호)에서 동룡(이동휘 분) 아빠 류재명 역을 맡아 출연하고 있다. 류재명은 아들인 동룡, 정환(류준열 분), 선우(고경표 분)가 다니는 쌍문고등학교의 학생주임이다.
tvN ‘응답하라 1988’3회 유재명, 혜리, 류준열, 고경표, 이동휘 캡처
▲ tvN ‘응답하라 1988’3회 유재명, 혜리, 류준열, 고경표, 이동휘 캡처
tvN ‘응답하라 1988’11회 유재명, 성동일 캡처
▲ tvN ‘응답하라 1988’11회 유재명, 성동일 캡처
'응답하라 1988'은 주된 배경이 쌍문동 골목이다. 때문에 유재명은 몇 안되는 장면에 출연했으나 학생주임답게 거칠고 화끈한 캐릭터를 통해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극 중 인물로 주목 받은만큼 류재명을 연기한 유재명 역시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예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유재명은 최근 뉴스엔과 인터뷰에서 차분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그간 걸어온 길에 대해 말했다.

유재명은 '응답하라 1988'에 출연하면서 소소한 변화를 겪었다. 드라마 인기는 날로 높아지고 있지만 배우 유재명의 일상은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게 사실. 그러나 잊고 살았던 사람들과 다시 연락이 닿게 된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부산에서 장사하는 어머니는 시장 사람들로부터 아들 드라마 재밌게 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응답하라 1988'은 과거를 현재에 그대로 옮겨온 듯한 싱크로율을 자랑하고 있다. 어느 동네 골목은 여전히 저러한 풍경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들면서. 배우들은 오죽할까. 촬영장에 가면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지 않을까.

"저는 주로 학교에 있어서 세트장에는 조금 늦게 갔어요. 세트장인지 알면서도 처음엔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옛날에 다닌 초등학교에 가면 모든 게 작아보이잖아요. 아기자기한 느낌이었죠. 요즘 일 마치고 들어가는 길이면 하늘 보면서 혼잣말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말하곤 해요. 친구들은 옛날 생각이 많이 나나봐요. 곤로, 단칸방, 옛날 통닭까지. 저는 노을(최성원 분)이 나이였고 집은 덕선(혜리 분)이네 같았어요."

덕선네, 정환네 부모들과 둘러 앉아 화투를 치던 장면은 두 시간을 촬영했다. 유재명은 다양한 얼굴을 보여줄 수 있었다며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사기꾼 같은 느낌을 주기 보다는 그 순간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어깨가 아프도록 화투를 치면서도 언제 시작해 끝났는지 모르게 제법 긴 장면을 소화해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살아 있네. 기가 막힌 장면이 나왔구나 생각했다. 성동일, 이일화, 김성균, 라미란 등 합을 맞춘 이들의 연기 실력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래서 유재명은 그 장면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었다.

그렇다면 유재명은 쟁쟁한 이들 가운데 어떻게 한 자리를 꿰찰 수 있었을까. 유재명은 영화 '바람'을 통해 '응답하라 1988'에 출연한거나 다름 없었다. 신원호 감독이 전 시리즈에서 배우 정우, 손호준 등 '바람'에 출연한 이들을 발탁한 것처럼 유재명도 그렇게 발탁됐다. 유재명은 '바람'에서도 선생님 역을 맡았다.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감독님께서 '바람'을 재밌게 보셨다는 거예요. 저는 '응답하라' 시리즈를 많이 좋아하고 '바람'에 나왔던 배우들도 다 아니까. 속으로 이제야 만나게 됐네요, 라고 했죠."

당시 감독 앞에서 선보인 연기는 몰래 극장에서 영화를 본 학생들을 꾸짖는 장면. 한 두 번 읽어봤을 뿐인데 그 자리에서 출연 제의와 약속이 오고 갔다. 유재명은 너무 빨리 출연이 결정되는 바람에 얼떨떨하면서도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고 흥분돼 "오! 드디어!"라고 쾌재를 불렀다.

유재명은 '응답하라 1988'엔 힘이 있다며 배우에게 알 수 없는 에너지를 불어 넣어준다고 말했다. 스위치를 켜듯 탁 터뜨려주는 무언가 있다는 것. 유재명은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밤에 거리에 나와 있는 정환과 동룡을 보고 쫓아가는 장면에서 그 알 수 없는 힘을 느꼈다.

"슛 들어가자마자 마구 뛰었더니 다들 육상선수로 있었냐고 하더라고요. 뛸 때는 몰랐는데 돌려보니 정말 빨리 뛰었지 뭐예요. 원래 달리기를 좋아하진 않거든요. 제작진 분들이 물꼬를 틀어주시니 배우들의 잠재된 능력이 살아나는 거 있죠? 저도 그 수혜자들 중 한 명이예요."

유재명은 40대 중반에 접어들며 과거를 돌아보게 됐다. 마흔까지는 부산에서 연극을 했고 극단도 운영하고 연출도 맡으며 지냈다. 그러다 뜬금 없이 야반도주하듯 서울로 올라왔다. 엄청난 대작을 건들곤 급격한 피로를 느꼈다는 것.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서울에서 생활한지 4년 됐어요. '응답하라 1988'같은 작품을 만나 개인적으로는 짠한 시절이예요. 팀을 하나 만들어 준비하고 있는 연극 작품이 있어요. 그 친구들에게 조그만 구멍가게같은 연극을 해보자고 말하곤 했는데 살림도 빠듯하고 여유가 없어 그간 약속을 못 지켰죠. 4년동안 거짓말쟁이가 된 거죠. 연극에 대한 애정이요? 애정보다는 제겐 숙명같은 거예요. 얼마 전 만난 후배가 그러더라고요. 4년 전에도 연극 이야길 했는데도 연극, 연극. 너무 추억에 붙잡혀 사는 것 아니냐고 했죠.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않겠냐고요."

그래서 유재명은 생각했다. 나는 왜 연극을 짊어지고 가려고 하나. 유재명에게 연극은 여행이고 휴식이었다. 돈을 많이 벌 생각도 없다. 그저 좋아하는 사람들과 소박한 밥상 차려 맛있게 먹고 싶었기 때문. 그에게 일과 연극은 철저히 별개의 것이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닌 오직 자신만을 위한 선물이었다.

"헤밍웨이가 그랬잖아요. 이 작품을 다 쓰고 나면 내게 낚시를 하는 기쁨을 주겠다. 저는 열심히 일을 해서 대중과 만나고 저를 불러주신 분들께 최선을 다한 다음, 여행가는 것보다 연극 하나 하는 것 뿐이예요. 사람들은 그게 또 욕심이라고 하지만 이제 그정도 욕심을 부릴만한 나이는 되지 않았나요? 그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까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재명은 내년 3월을 목표로 작은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일정 때문에 힘들어도, 등 떠밀려 가는 것 같아도 들어섰으면 가야겠다고 다짐, 그 다짐대로 한번 가볼까 생각하고 있다. 도전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배우의 입에서 '등 떠밀려 간다'는 말이 나오다니 의외였다. 그는 지금까지 헤쳐오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며 길고 긴 과거를 털어놨다.

"변명을 많이 했죠. 살살 한발 씩 빼곤 했어요. 서울에 적응하고 이 일에 적응하고, 준비가 안된 것 같았죠. 그런데 '응답하라 1988' 후엔 일도 조금 더 들어올 것 같고 저를 믿고 기다려준 친구들이 '가시죠!'라고 하니까 '안 돼, 바빠'하다가도 '바쁘지만 가볼까?'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이 편해졌달까."

사실 서울에서 지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연극에 미쳐" 휴학하고 올라와 좋아하는 형들과 영화 팀을 만들었고 16mm 카메라로 야심차게 영화 한 편을 준비했다. 그러다 "빚만 지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10년 만에 서울로 올라온 것. 10년 사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새카맣게 잊었을 정도로 두 번째 올라온 서울에선 정말 바쁘게 살았다.

그리고 그에겐 여전히 좋은 작업자가 되고 싶은 꿈이 있다. 마흔 중반에 들어서면서 연기를 잘한다는 게 무엇일까 고민도 했다. 스스로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말이다. 유재명은 4년째 학생들과 인연을 맺어 청소년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그는 한 일화를 밝히며 자신의 직업관을 설명했다. 당시 유재명은 학교 폭력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역할을 맡아 고민하고 있는 한 학생에게 조언을 해줬다.

"들어보세요. 머릿 속에 스크린 하나 걸어놓고 상상을 해보는 거예요. 어떤 아이가 있어요. 그 아인 왕따를 당하고 있죠. 아침에 눈뜨면 눈 감기 전까지 매 순간이 고통스러운 아이예요. 누군가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아무도 말을 거는 사람이 없고 밥도 혼자 먹을 수밖에 없어요. 학교 마치는 길에 친구가 '누구야'라고 이름을 부르면 그 이름이 가슴에 박히는 아이, 누가 어깨를 치면 그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는 아이죠. 점심시간에 창문에 햇살이 들어오면 그 햇살의 입자를 볼 수 있는 아이예요. 왜냐고요? 소중하니까."

"선생님이 분필로 칠판에 글을 쓰면, 하얗게 떨어지는 백묵이 마치 눈같이 느껴지는 아이일 거예요. 왜냐고요? 외로우니까. 학교 마치고 가는 운동장의 발걸음, 운동화 밑에 떨어지는 알갱이마저 느껴지는 아이일 거예요, 외로우니까. 연기? 안 해도 된다고 말해줬어요. 혼자 남겨진 교실에 가만히 웅크리고 그 외로움을 느끼고 있으면 조명을 저 위에서 비춰주겠다고 했죠. 고스란히 햇살을 느끼며 외로움을 간직해주기만 해달라고 했어요. 처음엔 한 번 울어보라고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그 순간에 있어주기만 하면 됐거든요."

유재명은 외로움, 자기 존재에 대한 환멸, 부정과 같이 결핍 없는 연기는 제 성에 차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아니라 외로움을 간직하는 배우가 돼 보는 사람이 그 감정을 같이 느끼게끔 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연기를 왜 하느냐고.

"관성으로 연기해도 되지만 원체 예민하고 생각이 많은 성격이라서요. 자연인 유재명과 좋은 작업자 유재명의 교차점을 꿈꾸지 않으면 허망하게 40대가 갈 것 같고, 또 아까울 것 같거든요. 그렇게 제 삶에 의미를 주고 있는 거죠. 주변 사람들은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하지만 제가 바라는 두 지점 사이 균형 감각을 찾는 게 현재 제 목표예요. 그 목표를 이루면 아마 50대가 될텐데. 그때는 또 새로운 걸 찾아가겠죠?"

김다솜 s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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